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리비아 내전 (문단 편집) == 전쟁의 시작 == [[https://commons.wikimedia.org/wiki/File:Libyas_flag_covered_with_blood_(2011).jpg|피로 물들어가는 리비아 국기 포스터. 내전을 의미한다.]] 2011년 2월 17일 [[벵가지]] 등 동부에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불 붙기 시작했다. 2월 20일은 차량 자폭 공격으로 벵가지 병영을 없애면서 벵가지가 시위대의 손에 들어갔다. [[http://www.hani.co.kr/arti/international/arabafrica/466083.html|기사]]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고 3월 초순에 이르러 시위대의 기세는 절정에 달해 수도 트리폴리,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 등을 제외한 거의 전 영역이 시위대의 손에 떨어졌다. 당시까지만 해도 카다피 역시 [[호스니 무바라크]]나 [[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]]처럼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. 그러나 카다피는 두 사람과는 다르다고 강변하듯 3월 중순에 들어서자 엄청난 양의 병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공세에 나섰다. 기세등등했으나 기본적으로 훈련과 무기가 부족한 시위대는 시르테 공격에 나섰다가 빈 자와드에서 지면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서방세계는 정치적 압력을 지속하였으나 카다피는 콧방귀를 뀌며 시위대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음과 동시에 외교력을 발휘해 UN의 제재를 막으려 들었다. 3월 10일에는 트리폴리 인근의 자위야와 시르테 인근의 빈 자와드를 빼앗기고 시르테와 벵가지를 잇는 교통 요지인 아즈다비야까지 위협받기 시작했다. 계속 밀리던 시위대는 거점 도시인 벵가지 코앞까지 밀려났고 정부군이 외곽에 도달하여 포격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었다. 시민군 인사들이 도망쳤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시위대의 패배가 명백하게 보였다. 그 때, 하늘에서 홀연히 프랑스군의 [[라팔]]이 나타나서 정부군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. 이는 3월 18일 [[UN]] 안전보장이사회가 뉴욕 시간 17일에 15개국 중 [[중국]], [[러시아]], [[독일]], [[인도]], [[브라질]] 등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찬성으로 리비아에 비행 금지 구역을 선포한 것에 따른 것이다. 카다피는 이에 시민을 보호한다며 정전을 선포하였다. 그러나 바로 다음날 손바닥 뒤집듯 벵가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서방세계는 [[오디세이 새벽 작전]]을 선포하며 프랑스의 첫 폭격을 시작으로 카다피군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였다.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시민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. 바야흐로 시위는 내전으로 발전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